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두 아들에게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책만 읽는다고 해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사색할 줄 아는 힘이 중요하다는 말일 터이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 대학생 때나 진득하니 앉아 장편소설도 읽고 여러 권의 책을 쭉 읽어댔던 것 같다. 직업을 갖게 되고 생활패턴이 바뀌면서 그런 독서는 휴가를 내어야만 가능한데, 피곤에 찌든 몸이라 그런지 휴가를 낸다 해도 독서에 적응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두 아이가 생기면서 아내와 아이를 팽개치고 책을 보는 몰염치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직장인과 가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면 처지가 비슷할 것이다.
원래 공부라는 것은 '스홀리'가 있어야 가능하다. '스홀리'는 그리스어로 '여유'를 의미한다.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금수저가 아니라면, 모두가 일정 이상의 노동을 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여유'란 그런 노동력을 누군가에게 전가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학생 때는 부모에게 노동력을 전가해야만 학원에 몰두할 수 있다. 직장에서 야근을 하면서까지 일에 몰두하기 위해선 집안일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은 엉망이 될 때가 많고, 주말에 집안일을 몰아서 해야 할 때도 생긴다. 여하튼 책 한 권 진득하니 읽기 어려운 현대사회에 무조건 많이 읽으라고 채근하는 건 무언가 맞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 독서가 끝나면 책장을 덮어버리고는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사유의 습관이 형성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좋을 리 만무하다.
나 역시 장자가 비판한 혜시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기호학을 공부했던 탓인지 지금 브랜드를 만드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난 다양한 현상을 일정한 흐름으로 꿰어 분석하고 그 안에 도도히 흐르는 의미의 물결들을 읽고 싶다. 그런데 내가 가진 시간으로는 다양한 현상들을 모두 파악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변화나 현상들을 지인들로부터 배우고 습득한다. 다만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 그 관점을 훈련하기로 했다. 이 역시 쉽지는 않다. 대학 때부터 나의 독서습관으로는 많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이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부분 이론적인 바이블들이다.
바이블은 특정 분야에서 지침이 될 만큼 권위를 획득한 책을 비유한 표현이다. 바이블은 많은 지성들의 '피어 리뷰'를 통해 권위를 획득한 만큼,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인기를 끌어 많이 읽히기만 하는 베스트셀러와는 개념이 다르다.
각 분야의 바이블들을 읽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리고 사회학, 언어학, 기호학, 역사학, 경제학, 동양철학, 서양철학, 인류학 등 인문학의 바이블들은 결코 친절하게 쓰이지 않았다. 이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그래서 학부 시절부터 여전히 계속 읽고 있는 책들도 있다. 해당 분야의 대가가 기록한 사유의 흐름들은 깊이와 폭에서 일반 텍스트들과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많은 책을 섭렵하게 되고, 다양한 책들을 일정한 관점과 맥락으로 묶을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유사한 경험까지는 해본 것 같지만, 여전히 낙타의 중급 단계에도 미치지 못했다. 잡다하게 등장하는 개론서들이나 유행을 반영하는 책들보다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뚝심 있게 흔들리지 않는 바이블을 읽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이 이미 수백 권의 책과 아티클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 한 권의 바이블을 시작으로 참고문헌에 기재된 아티클과 책들을 하나씩 따라 읽어가다 보면 그 분야에 대한 흐름이 잡힌다.
이미 독서와 사색에 도가 튼 사람들은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잡다하게 여러 권의 책을 섭렵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을 버려야 원하는 것이 채워질 것이다.
<기획자의 습관> 중에서
무슨 일이든 가장 힘이 드는 부분은 아마도 뭔가를 꾸준히 해내는 지속력일 것이다.
꾸준히 해낼 수 있도록 지속력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적은 바로 욕심이라 생각한다.
욕심을 내면 나도 모르는 순간 마음의 평정심을 잃고 나와 관련된 모든 관계에 있어서 조급함을 내비치게 된다.
내 모습에 조급함이 점점 자라나게 되면 나에게 오는 모든 피드백이 간섭과 참견, 방해꾼으로 여겨지면서 그 조급함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나의 지속력에 금이 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의 뜨거웠던 초심은 어느새 식어버리고 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무한 반복하고 살고 있다.
이런 어처구니...
욕심을 버리고 담담히 뚜벅뚜벅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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