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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절집 오르는 마음

by 거꾸로 아빠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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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 절집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절집 오르는 마음이란 제목이 나를 끌어당긴다. 미술과 건축을 탐구하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본 곱게 늙은 절집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절집은 그 넓은 포용력으로 나를 끌어당기며 절집을 두르고 있는 자연의 감흥은 나를 압도해버린다고 말한다. 고건축과 부처님만 친견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오는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겠나. 

 

역사가 깊고 사연이 많은 고찰의 유장한 세월 앞에 나를 데려다 놓으면 어떠한 근심 걱정도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 이런 마음이 절집 오르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절집마다의 역사와 사연을 문화제 관리사가 설명해주듯 친절히 얘기해 주어서 절집을 찾는 재미를 알게 해 준다. 각각의 사연이 있는 암자의 사진들이 몰입감을 한층 더해 준다.

 

열일곱 곳의 사찰과 몇몇 암자들의 구석구석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거기에 대해 일엽 스님은 성성 적적,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으라 했고, 정관스님은 매일이 수행이라 했으며, 법정스님은 거듭 새로 태어나라고 했다. 읽어보시라.

 

 

절집_오르는_마음_책
절집 오르는 마음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법정스님 머무는 곳엔 자연이 고요히 깃들고

비구 법정. 다른 어떤 수식어도 이름도 없이 그것 하나만 갖고 살았던 한 인물을 찾아왔다. 집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 나는 한 사람을 알아가고 싶을 때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법정스님 하면 길상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친 곳이고 스님이 입적한 곳이었다. 길상사를 즐겨 찾는 나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진영각을 목적지로 하고 돌아보곤 했다. 그런데 법정스님이 잠든 곳이 또 한 군데 더 있다고 하니 그곳이 궁금해졌다. 무소유뿐 아니라, 수행자였던 스님의 공간도 알고 싶어졌다.

1975년, 출가수행자로서 본분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돌아온 곳이 송광사였다. 마음속에 자라는 증오와 혐오를 수행자로서 되돌아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수행에만 집중할 토굴 터를 찾아보다가 송광사 뒷산에 자리한 자정 암 터를 발견한다. 옛 암자는 거의 허물어지다시피 했지만, 남쪽으로 훤히 열린 넓은 뜰은 햇볕이 잘 들었고 샘물도 맛이 좋았다. 매화가 여기저기 꽃을 피워 향이 가득했다.

스님은 낡은 건물에서 수습한 목재와 기와로 승방을 마련하고 수행 공간으로 삼을 본채를 다시 지었다. 이곳이 매일 부처가 온다는 뜻을 가진 불일암이다. 법정스님의 생각을 담은 '무소유'라는 책은 그즈음 이미 세상에 나왔지만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것은 불일암에서였다.

입적하고도 10년이 넘은 지금, 그 방은 여전할까? 반가워서 다가가던 나는 불일암 벽에 걸린 '묵언'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다. 오늘따라 창문이 활짝 열려있건만 그 말이 무거운 도끼처럼 여겨져 차마 창문 너머로 들여다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박나무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이 어찌나 아담하고 예쁜지 웃음이 다 나왔다.

송광사_불일암
송광사 불임암

 

가야산 해인사

강화도의 장경 판이 어쩌다 해인사로 갔을까

해인사 하면 팔만대장경인데, 공간도 경전을 닮았다. 아무리 넘겨도 페이지가 줄어들지 않는다. 결론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고, 어쩌면 반전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쌓인 길고 긴 이야기, 해인사를 거쳐 간 수많은 고승, 선승의 이야기, 불타고 새로 지은 절집 이야기, 왕조를 거듭하며 작은 절이 점점 커지는 이야기, 여전히 건립 시기를 알 수 없는 불상 이야기, 그리고 절집을
찾아온 사람들이 더하고 더하며 완성한 또 다른 이야기들은 팔 만장을 넘겨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해인사의 건축물도 다른 사찰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신라 애장왕 때인 810년에 창건되었다고는 하나 수많은 화재를 겪으며 중창 또 중창하느라 매번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했다. 화재가 집중된 대적광전은 여러 번 다시 지어 지금의 건물은 19세기 초반의 것이다. 그러니 해인사의 풍경에서 천년 고찰의 매력을 찾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산사 하면 해인사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그 이유도 역시 건축이다. 경사지에 단차를 두고 네 개의 공간이 배치된 가람 구조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걷다 보면, 몸이 상승하면서 감정도 함께 고양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장경판전의 압도적인 규모와 단순함에는 설명할 수 없는 힘과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대장경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불사한 대규모 프로젝트다. 경판 수가 팔만여 개에 달해서 팔만대장경이라 하지만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1011년과 1098 년에 초조대장경과 속장경 등 두 번의 대장경을 탄생시켰으나 모두 외적의 침입으로 불탔고, 1251년 완성되어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었던 고려대 장경만이 살아남아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목판 수는 모두 8만 1,258판이다.

대장경은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의 내용을 산스크리트어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것과 함께 후대에 덧붙인 논서, 주석서, 이론서 등을 모두 집대성한 불교 경전의 총서이다. 나무로 만든 경판은 부식이나 화재의 위험이 늘 뒤따랐으나 7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있다.

그런데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대장경이 어떤 이유에서 머나먼 가야산 해인사로 오게 되었을까? 고려대장경을 둘러싸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들이 많지만, 장경판을 해인사에 보관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지난 백 년간 학자와 스님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이어져 왔다.

대장경 이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자료는 『태조실록』이다. 태조 이성계가 강화도의 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기라는 어명을 내렸다.

온 백성들이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한양에 입성한 대장경은 지금 서울시청 광장 부근에 자리한 지천사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물길과 육지 길을 따라 해인사로 이동했다. 어마어마한 수량의 장경 판이 멀고 먼 길을 이동한 것이다. 엄청난 인력과 수개월의 시일을 들인 대대적인 이운 작업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해인사로 이운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외침. 고려는 원나라와 홍건적의 침입 등 수많은 외침이 있었으며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남쪽의 왜구들이 노략질을 일삼았다. 왜구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사찰을 불태운 사건(1360년)은 고려대장경의 피난처를 찾는 일로 이어졌다. 해인사는 해발 1,430미터에 달하는 가야산의 중턱, 첩첩산중에 있어 왜적의 침입이 한 번도 없었던 곳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해인사에 사고를 두어 국가의 중요 문서들을 보관해 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이나 문집들을 출판하고 보관했을 뿐 아니라, 전란이 발발하면 유교 경전과 국가기록물 등 더욱 많은 사료들이 해인사로 향했다. 그렇다면 장경각을 새로 세우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문서고가 존재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대장경 이운이 단순히 왜구들의 습격에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새나라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대국민 메시지를 담은 정치적인 기획으로 대장경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다수가 불교신자인 백성들 입장에선 조선이 고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고려대장경 정도는 움직여야 했다. 즉, 국왕이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국가적인 보물을 백성들에게 널리 보여주며 민심을 위로했던 행사였다는 것이다.

 

해인사_장경각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


팔공산 은해사

팔공산 은해사는 신라 41 대 헌덕왕 1년인 809년에 혜철 국사가 창건한 해안사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산으로 둘러진 사찰에 안개가 끼면 은빛 바다가 된다고 해서 은해사다. 사찰 규모도 꽤 넓은 편이고 산내 암자들도 여덟 곳이나 된다. 오늘은 암자 중에 가장 위쪽에 자리한 운부암에 가보기로 했다. 

팔공산은 경상북도에 넓게 자리한 산으로 대구, 영천, 군위, 칠곡, 경산에 골고루 퍼져있다. 큰 봉우리에 비로봉과 미타 봉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붙일 정도로 불교문화가 번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판각하고 봉안한 부인사,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지휘하던 동화사, 조선 임금 영조의 위패를 모신 파계사, 그리고 북지장사, 지금 우리가 와있는 은해사 등 큰 절도 많다. 큰스님들이 수행했던 수많은 암자들까지 합하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해마다 수능 때가 되면 기도하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되는 갓바위 관봉 약사여래좌상도 있으며, 수많은 석탑과 마애불이 넘쳐난다.

은해사는 모두 여덟 개의 산내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거조암, 기기암, 묘봉암, 백흥암, 서운암, 중암암, 백련암 그리고 운부암이다. 운부암은 71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은해사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창건할 당시에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났다고 해서 운부암이라 했단다. 오늘 본 것처럼 그날도 흐린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환한 햇살이 드러나고 새하얀 구름이 모여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운부암은 담도 없고 문도 없다. 누구나 마음껏 드나들어도 된다. 보화루의 중앙계단으로 올라가면 온전히 사찰안이다. 주불 전인 원통전이 정중앙에 자리하고 동쪽에운부란야, 서쪽에 우의당 두 건물이 있다. 네 건물이 교차하는 정중앙에 작고 단정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탑 앞에 고행 중인 승려를 조각한 작은 조각상도 하나 놓여있다.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탑이 결국 수도승이 가야 할 길이라는 뜻이런가?

 

은해사_보화루
팔공산 은해사 보화루

 

봉정사와 도산서원

완결된 두 세계가 나란히 이어지고

 

1516년 봄, 열여섯 소년 퇴계가 봉정사에 왔다. 안동부사에 부임한 숙부 총재 이우가 아들 이수령과 함께 공부하라는 뜻에서 부른 것이었다. 둘은 봉정사에서 반년에 걸쳐 독서를 이어갔다. 두 젊은 선비의 공부를 위해 짓고 있던 애련정이 완성되자 그들은 봉정사를 떠났다.

그로부터 오십 년 후 퇴계는 다시 봉정사를 찾았다. 오십 년 전 거닐고 바라보던 명옥대 골짜기에 올라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쓸쓸함이 밀려왔다. 퇴계는 봉정사 만세루에 남아있는 선비들의 시문에 이어 봉정사에서의 감회를 담은 시를 지었다.

법당 서쪽에 누각 하나 가로질러 있는데
신라 때 창건하고 몇 번이나 중창되었던가.
부처가 등불 타고 내려왔다는 말은 참으로 허황되고
태가 왕기를 일으켰다는 말도 정히 진실이 아니네.
빗기를 잔뜩 머금은 산은 녹음이 더욱 짙고
화창한 봄을 전송하는 새는 정답게 지저귀네.
젊은 시절 머물렀던 곳에 표류하듯 이르고 보니
백발노인 헛된 명성 구한 세월이 한탄스럽네.
-퇴계 이황, 『퇴계집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봉정사는 학문의 공간이자 사색의 장소였다. 많은 선비들이 소년 시절 공부하러 사찰에 드나들었다. 퇴계의 형제들도 모두 용수사를 공부방으로 삼았다. “내 나이 열여섯 살에 이곳에서 독서를 하였다."라는 퇴계의 회고는 만세루에 서있던 소년의 맑은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읽은 책은 유학서의 기본인 사서삼경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공부하러 절에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곤 하는데, 이런 학업 행태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인 줄은 몰랐다.

퇴계가 머물렀던 곳이니 퇴계의 제자들은 봉정사를 성지처럼 여겼다. '봉황이 머문다'는 봉정의 의미가 퇴계가 머물던 곳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다르게 받아들였다. 명산이고 명찰이라서가 아니라 퇴계 선생이 독서한 곳이라서 봉정사는 중요한 장소로 강조되었다. 유학자들은 지금 우리와 다른 의미로 사찰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증오하기도 했다. 사찰의 의미와 역할이 시대마다 다르게 적힐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도산서원도 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하나씩 열린다. 문지방에 휘어진 나무를 사용한 것이며 네모난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건물을 세워 오롯이 하나의 세계만을 바라보게 한 것이며, 물길로 막히고 숲 따라 난 외길로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은둔적인 분위기도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봉정사가 아름다운 만큼 도산서원도 눈부셨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에 '시사단'이라는 유적지가 있다. 동그란 인공섬인 그곳은 때때로 물이 줄어들면 육지가 되는 기묘한 장소다. 과거를 볼 때 한양까지 오지 말고 도산서원에서 보라는 교지가 내려진 것에 감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시사단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연못에 조성하는 인공 자연인 석가산 같았고 불가에서 세계 중앙에 솟아있다는 수미산 같았다.

완벽한 하나의 세계 옆에 또 다른 완벽한 세계. 나는 이 두 세계가 적어도 공간적으로는 매우 닮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로 통할 수 없을 줄 알았던 두 세계였지만, 사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란 애초에 없었다. 정점을 향한 세계는 서로 닮는다. 그리고 서로 통한다.

 

도산서원 시사단
도산서원 시사단


만덕산 백련사

차 한잔 들고 가시게

불교문화가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된 18세기 즈음, 강진에서는 주목할 만한 만남이 탄생했다. 유배를 떠난 다산 정약용과 혜장 스님의 만남이 그것이다. 만덕산 깊은 골짜기에 초당을 짓고 공부하고 책을 쓰며 제자를 길러냈던 정약용은 동쪽 골짜기 너머에 있는 백련사(정약용이 유배 왔을 무렵엔 만덕사라 했다)의 주지 아암 혜장과 깊은 교유를 나누었다.

하루는 다산이 혜장의 거처로, 그다음에는 혜장이 다산의 거처로 왔고, 그러다 어느 날은 서로의 중간에서 만나 끝도 없이 담화를 나누고 헤어졌다는 아름다운 장면이 만덕산에 아로새겨졌다.


다산이 『시경』 『서경』 『주역』을 읊으면 혜장은 「화엄』 『능엄』 『원각경』으로 답했다.『논어』를좋아하던 혜장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입적하자 정약용은 "묵명유행(墨名儒行), 승려의 이름으로 선비의 행실을 보였다."라고 비문을 기록했다. 이렇듯 학문적 영역에서 정약용이 우애를 보였다면 혜장은 무엇으로 그 우애에 답했을까? 그것은 바로 차였다.

이들의 만남에 차를 빼놓을 수 없다. 다산과 혜장의 교유는 차문화 연대기인 『동다송』을 쓴 초의선사,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문사 추사 김정희, 차를 빚고 글을 빚던 정약용의 제자 이시헌까지 이어지는 선비와 승려의 만남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차가 있었다.

승려들이 수행을 위해 차를 마셨다면 선비들 역시 수신(修身)을 위해 차를 즐겼다. 차는 온전한 품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존재였다. 정약용은 10대 시절 부친의 부임지인 화순의 동림사에서 차를 접했다고 한다. 세밀한 관찰력과 취향을 가진 다산은 20대가 되자 햇차를 기다렸다가 받아 마시고 찻물까지 품평할 정도로 섬세한 차 습관이 형성되었다.

정약용의 차 생활은 차의 고장인 강진에서 유배를 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정약용의 거처이자 학문의 중심지였던 만덕산 깊은 곳의 초당 차나무가 많던 그 산을 다산이라 불렸던 데서 정약용의 호가 '다산'이 되고 초당의 이름도 다산초당이 되었다. 다산초당은 차를 만들고 나누며 차인(茶人)을 양성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표표히 명맥을 이어오던 강진의 차 문화는 다산과 만나 깊고 큰 뿌리를 형성한다. 차 문화사를 정리한 책 동다송』을 쓴 대흥사의 초의선사가 다산의 제자가 되어 유불을 함께 교류했고,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 백운봉 아래에서 자란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그 후손이 '백운 옥판 차'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니 강진에선 사찰만 보아서도, 초당만 보아서도, 차만 맛보아서도 안 된다. 이 세 가지를 함께 경험해야 강진의 풍경을 꿰어놓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백련사에서 차밭을 보고 초당으로 넘어가면서 다산과 혜장의 걸음을 흉내 내어볼 것이고, 월출산 아래 펼쳐진 너른 차밭과 백운동 별서에서 실컷 찻잎의 기운을 흡입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해남으로 내려가 초의선사가 은거했던 대흥사의 일지암으로 올라갈 것이다.

백련사에서 대흥사까지 약 25킬로미터의 길은 그냥 길이 아니었다. 각자의 길을 찾으려 하면서도 서로의 길을 아꼈던 학문과 취향과 마음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나는 차 향기 감도는 문화 루트를 되살려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백련사_해탈문
만덕산 백련사 해탈문


봉황산 부석사

인생의 다음 여정을 오를 때면 늙은 절집으로 가자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경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청송 주산지에 갔다가 영주 부석사에 왔더니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어둠이 몰려오는 절집을 힘겹게 올랐으나 법당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유명한 부석도 기억에 없다. 다만 배흘림기둥은 점찍듯 보았던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다 내치고 내가 보았던 것은 안양루 앞에 펼쳐진 먼 세상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산 능선이 얼마나 장대하고 아득하던지, 가만히 서있어도 눈물이 났다.

그즈음 나는 아이를 갖고 싶은 열망을 품고 좋은 곳을 다녔다. 좋은 마음을 품고 좋은 생각을 하면 아이가 온다는 말도 철석같이 믿었다. 나는 좋은 마음을 먹고 좋은 생각만 하다가도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날도 조금은 울었을까? 부석사는 세상 초연한 모습으로 그늘을 드리웠는데,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내 마음이 계속 바뀌었다.

누각을 오르면 또 다른 세상이 나오고 그다음 누각을 올라가 면 또 다른 세상이 나왔다. 그 계단 하나하나에 짐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려놓지 않으면 끝없이 나오는 그 많은 계단을 다 올라갈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많은 계단을 놓았구나, 한 단 한 단 끝날 때마다 쉬어갈 자리를 만들어놓았구나, 그런 생각만 들었다. 가장 높은 곳인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 섰을 때는 마음에 빈틈이 생길 정도였다. 그 틈으로 세상의 풍경이 밀려들어 왔다. 이 풍경을 보여주려고 이 절집이 이 자리에 놓였나 보다. 절묘하고 신묘했다.

 

봉황산_부석사
봉황산 부석사


내 몰골은 초라했으나 그때 보았던 세상은 찬연히 아름다웠다. 골골이 이어진 산들로 둘러싸인 이 세상이 참 아늑해 보였다. 무량수전은 세상의 풍경을 모두 감싸 안으며 조금씩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그때 왜 부석사를 갔을까? 아마도 부석사라는, 뭔가 발에 걸리고 입안을 서걱거리게 하는 그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신경숙 소설가가 쓴 짧은 소설에 등장하는 부석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부석사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끝끝내 가고자 하는 그 부석사가 왠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주인공이 그곳에 가려는 건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거길 꼭 가보라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능선 뒤의 능선 또 능선 뒤의 능선이 펼쳐지는 그 의젓한 아름다움을 보고 오면 한 계절은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 힘이 생긴다.'
_신경숙, 부석사-국도에서 종소리』

부석사 하면 최순우 선생의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선 부석사를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_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절집_오르는_마음_책_든_아이
절집 오르는 마음


아름다움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하게 되는 곳이자 의젓한 아름다움을 보고 나면 세상을 견뎌낼 힘을 갖게 되는 곳. 나는 이런 장소가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인생의 그다음 여정을 오르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 할 곳인 양 마음속에 넣어두었다. 스산하면서도 호젓한 풍경으로, 결코 화려하지도 생기가 넘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소진된 것도 노쇠한 것도 아닌 풍경으로 세상의 경계를 보여주던 부석사.

거길 다녀와서 힘을 얻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날의 나는 아팠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날의 부석사는 내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 속한다. 쪼그라든 마음에도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 사무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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