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풍경이고 싶었다
황세원 작가
긴 여정에는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 모든 여행지를 온 마음을 다해 샅샅이 둘러볼 수는 없다. 그날 빨래방에서의 짧은 만남 덕분에, 나는 이후 종종 '여행 휴일'을 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자꾸 무언가를 느끼도록 애쓰는 것도 그만두었다. 마음에 와닿지 않으면 가볍게 스쳐 지나가고, 그렇게 아껴 둔 마음은 언젠가 마음에 쏙 드는 장소가 나타났을 때 애정을 쏟기로 했다. 장기 여행은 여행일 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생활 패턴이었다. 때로는 여행하지 않는 시간들 덕분에 오히려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쉼에도 쉼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남들이 걷는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듯, 내가 걷는 길을 남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다. 빙하는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모양도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모레노 빙하는 10일에 한 번씩 트레킹 코스를 바꾼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차피 내가 걸은 길을 다시 똑같이 밟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을 택해 걸어갈 뿐이다. 끝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퀴버트리는 가지의 끝이 계속해서 둘로 갈라져 자란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순간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시작점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되고, 내일의 나로 갈라져 나오면서, 모든 건 뿌리에서부터 지금까지 차곡차곡 이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오로지 선택과 가능성만이 있을 뿐. 정해진 것은 어제 뒤에 오늘이 있고, 오늘 뒤에는 내일이 있다는 것뿐이다.
영화 <라라랜드>에 '재즈는 매번 연주가 새로워서, 매일 밤이 초연'이라는 대사가 있다. 사실은 재즈뿐 아니라, 모든 사람도 모든 장소도 매일이 초연이다. 여행지는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여행자는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한다. 같은 계절에 같은 장소를 같은 사람과 여행한다 해도, 아주 사소한 차이가 수없이 많은 변주를 만들어낸다. 그 어떤 여행도 반복 재생되는 일은 없다.
모든 약속은 와인과 같을지도 모른다. 한 번씩 꺼내 보면서 만지작거려보는 와인일 수도 있고, 구석 어딘가에 숨겨둔 뒤 잠시 잊어버리고 만 와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사라진 것은 없다. 단지 아직 열지 않았을 뿐.
와인은 기다릴수록 그 맛이 더 훌륭해진다. 정말 좋은 시간도 오랜 기다림 끝에 느낄 수 있다. 나는 내게 남은 와인병들을 언젠가 다 열어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나의 와인을 드디어 함께 비우며, 아직 열어보지 못한 빨갛고 하얀 와인병들을 찬찬히 기억해보았다.
매일 다른 곳에서 눈을 떴고 매일 다른 풍경을 보았다. 누군가는 내가 그 시간 동안 느낀 변화가 그저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변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말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 어떤 8개월의 기간보다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을 열어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입장을 겪으며 사랑하는 것들을 늘려나가는 것. 그렇게 어제보다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 내게 여행은 그런 마법 같은 일이다.
나는 여전히 살아가며 여행하며 마주하게 될 모든 것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정거장에 내렸다 다음 차량을 타는 것인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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