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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니체의 생애와 유산

by 거꾸로 아빠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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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독일 라이프치히 외곽의 뢰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카를은 루터교 목사였고, 할아버지는 목사 겸 개신교 학자였다. 마찬가지로 목사의 자녀였던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열일곱 살 때 카를과 결혼해서 1년 뒤 프리드리히를 낳았고, 1846년에 엘리자베트, 1848년에 루드비히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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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프리드리히가 겨우 4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병에 걸렸고 몇 달 뒤에 뇌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당시 2살이던 동생 루드비히도 사망했다. 목사의 수입과 관사를 잃은 가족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나움부르크로 이사했다. 이후 그는 다섯 식구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친할머니, 친할머니의 자매 두 명, 여동생 사이에서 유일한 남자로 자라났다.

 

소도시 뢰켄에서는 그의 가족이 유명하고 존경받았지만, 이곳에서는 다소 고립된 생활을 했다. 가족들에게 '프리츠'라고 불리던 니체는 조숙하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병약했다. 12살 때부터는 두통과 눈의 통증을 겪기 시작했다. 

 

그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초반에 사귄 구스타프 크룩과 헬름 필더라는 두 친구와의 우정을 평생토록 이어갔다. 그는 이 친구들의 가족을 통해 진지한 문학과 음악을 접하게 됐고 직접 작곡을 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고전뿐만 아니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같은 독일 거장들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14살 때 니체는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명문 개신교 기숙학교인 슐 포르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는데, 이는 성적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작고한 목사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그래도 니체는 그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고, 히브리어와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몰두했다. 또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비판적으로 고찰한 예수의 생애>를 읽었는데, 니체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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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술포르타에서 거둔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19살이던 1864년에 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 문헌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코니아라는 단체에 가입했고, 기독교에 의혹을 제기하는 작품을 계속 읽은 끝에 한 학기 뒤에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와 여동생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본에서 1년을 보낸 뒤, 니체는 가장 좋아하는 교수인 프리드리히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교로 가서 언어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논하는 첫 번째 글을 발표했다.

 

그는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해에 미학과 음악을 강조했던 임마누엘 칸트의 무신론자 후계자인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작품을 발견했다. 비록 나중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 중에 동의하지 않는 여러 부분을 발견했지만, 당시에는 그의 철학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은 니체의 사상과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학년 때는 프리드리히 랑게의 《유물론의 역사>를 읽고 다윈의 진화론을 처음 접하게 됐다. 1867년에는 전도가 유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1년간의 군 복무를 신청했는데, 6개월 만에 말을 타다가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은 감염과 다른 합병증으로 이어졌고, 합병증과 싸우다가 그를 평생 괴롭히게 될 소화기 문제까지 생기는 바람에 두통과 눈 통증의 고통이 가중됐다. 

 

군 복무 기간과 회복 기간에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집에 살면서 진지하게 읽고 쓰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학사 학위 취득에 필요한 기간에만 라이프치히에서 지냈다.


1868년에 그에게 2가지 중요한 전환점이 발생했다. 첫째, 작곡가 바그너를 만났다. 바그너는 이후 10년 동안 니체의 친구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 미적 영감을 주었다. 두 사람 다 쇼펜하우어에 관심이 많았고, 니체는 바그너의 예술 이론에 깊이 매료됐는데 이 이론은 당시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4 연작을 작곡 중이던 바그너의 창작의 원천이었다. 

 

둘째, 리츨 교수와 다른 사람들이 니체를 바젤대학교 문헌학 교수로 추천했고, 니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24살의 나이에, 박사학위 과정도 마치지 않은 채로 최연소 고전 교수가 됐다. 니체는 교수직을 수락하면서 프로이센 시민권을 포기하고 평생 합법적인 무국적자로 지냈다. 교수가 된 그는 강의와 연구에 부지런히 몰두했다. 그리고 1년 만에 종신 재직권을 받고 봉급도 인상됐다. 하지만 그는 고전 분야의 방법론과 환경에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됐다.


1870년에 니체는 시민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구급차 운전사로 복무했고, 이때 디프테리아와 이질에 감염되어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바그너를 자주 방문했고, 바그너의 아내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도 친밀해졌다.

니체의 첫 번째 책인 <비극의 탄생 The Birth of Tragedy from the Spirit of usic)은 1872년 초에 출판됐다. 이 책은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지 못했고 비평가들의 칭찬도 받지 못했다. <비극의 탄생》은 표면적으로는 그리스의 고전 비극에 관한 것이지만, 문화와 철학을 강조했다. 

 

이 책은 독일과 프로이센이 지향하던 정치적, 문화적 방향에 대한 니체의 혐오를 반영하고, 척박하고 메마른 분야에서 그가 느끼는 창조적인 충동을 보여 준다. 또한 전체적으로 예술과 음악에 관한 바그너의 시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몇 년뒤, 니체는 이 책의 새로운 판을 위한 서문을 쓰면서 기존 내용을 부분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아폴로/디오니소스의 구분이나 다른 요소들은 20세기 예술과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의 두 번째 책인 《계절의 생각 Thoughts out of Season》은 1872년부터 1876년까지 부분별로 출판됐다. 이 책은 문헌학에서 벗어나 철학적, 문화적 주제로 향하는 그의 지적 전환을 확고히 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계속해서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로 이사해서 <니벨룽겐의반지>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음악 축제를 조직했다. 바그너가 이사한 이후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결코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관계가 유지됐다.

니체의 건강과 시력은 계속 악화됐고, 며칠 동안 발작을 일으키면서 부분 실명, 고열, 구토, 설사를 겪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바젤대학교에 결근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자 결국 1879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연금을 받게 됐다. 그는 시력이 나빠서 짙은 색의 색안경을 써야 했고, 책을 쓸 때는 구술을 받아 적을 친구나 조수가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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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니체의 중기라고 하는 1878년부터 1883년까지 그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Human, All-Too-Human》, 《서광 The Dawn of Day》, 《즐거운 지식 The Joyful Wisdom》,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 Thus Spoke Zarathustra》 등 네 권의 책을 출판했다.

 

앞의 3권은 경구적인 글을 모은 책으로 각 장의 길이가 한 줄짜리부터 몇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니체의 철학 사상 중 많은 내용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완전히 다르다. 이 책은 산문시, 신비주의적인 배경, 밀도 높은 암시, 그리고 <니벨룽겐의 반지>를 연상시키는 중심 사상 등 다양한 요소가 가미된 소설 작품이다. 

 

니체가 허무주의의 망령을 물리치기 위해 추천한 대응 방안이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 원칙에 대한 니체의 기여이며 예시다.


니체는 교수직을 그만둔 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했고, 이런 생활은 그가 창작활동을 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름은 스위스의 실스 마리아에서 보내고, 겨울은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보냈으며, 가끔 가족과 함께 나움부르크에서 지낼 때도 있었다. 그는 1882년에 로마에서 친구 파울 레의 소개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게 된다. 니체는 젊고, 총명하고 아름답고, 반항적인 살로메를 사랑하게 됐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안타깝게도 살로메의 계획은 니체와 레와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이는 니체에게는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살로메와 그녀의 자유분방한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의 관계를 끊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살로메와 레, 니체는 각자의 길로 떠났다.

 

니체는 이 시기에 심한 고립감에 시달렸다. 가까운 친구와 애정을 쏟던 상대를 잃었고, 가족과 멀어졌으며, 곧 바그너의 부고까지 들려왔다. 그는 이런 감정 상태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니체는 건강이 나빠졌으나 반대로 생산성은 높아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서 책을 읽어 주고 구술 내용을 받아 적는 등 도움을 줬다. 니체는 이전에 출간한 책 몇 권에 내용을 추가하고, 1886년에는 《선악의 저편 eyond Good and Evil》, 1887년에는 《도덕의 계보 The Genealogy of Morals》를 출판했다. 1886~1887년에 '권력에의 의지 The Will to Power'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뒤죽박죽 적어 놓은 혼란스러운 메모만 남기고 포기하고 말았다.

 

1888년에 그는 5권의 짧은 책을 출판했는데, 그중 마지막 책은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평생 병상에서 생활했으며 처음에는 어머니, 나중에는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의 편지와 《이 사람을 보라》에는 그의 정신건강이 1888년 말까지 점점 불안정해졌다는 증거가 있다. 그를 아는 몇몇 사람은 병이 꽤 오랫동안 악화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병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진단은 없다. 한때는 매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병일 수도 있고, 다른 건강 문제 때문에 복용한 약물의 결과일 수도 있고, 뇌종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와병 중에 그의 신체 건강 문제는 상당히 완화됐으므로 아마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 상태로 10년을 더 살다가 1900년 8월 25일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니체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는 니체의 말년과 사후, 그의 상속자이자 작품 큐레이터였다. 

 

엘리자베트의 삶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흥미롭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정신적 불안이 여러 가지 형태 띨 수 있다고만 말해 두겠다. 그녀는 니체가 남긴 메모(개중에는 단순한 낙서에 불과한 것 도 있었다)를 모아 《권력에의 의지》라는 책을 편집했고, 1906년에 완전한 판본을 출판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니체의 결정적인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되지 않으며, 엘리자베트의 홍보와 달리 절대 그의 대표작도 아니다. 니체는 정신적으로 붕괴되기 전에 출판사에 책을 몇 권 팔았는데, 판매량이 수천 권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그는 출판사와 결별했고, 나중에 발간한 책들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저축과 연금을 써서 자비 출판해야 했다.


1888년에 유럽의 저명한 비평가인 기오 브란데스가 한 일련의 강의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브란데스는 니체의 철학을 '귀족적 급진주의'라고 부르면서 그를 중요한 사상가로 세상에 소개했다. 니체는 이런 상황 전환을 알고 있었고, 브란데스에게 그 용어에 찬성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정신 능력은 인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는 모습을 볼 만큼 버티지 못했다. 다음 도표는 니체에게 영향을 준 이전 세대 지식인들과 니체가 영향을 미친 후임자들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니체는 단순히 전임자들의 사상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수정한 뒤 그걸 후임자들에게 물려줘서 더 다듬게 한 게 아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종합해서 복잡하고 다양한 영향을 널리 퍼뜨렸다. 그의 사상은 다양한 분야와 상호작용했고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에 국 한 되지 않았다.


이 흐름의 세부 사항을 이해하려면 니체의 사상을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관점주의'는 모든 주제에 대한 모든 견해는 특정한 관점에서 생기며, 중요한 것은 완전히 객관적인 입장이 없는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세상을 구성하는 개념은 '환상'이며, 그것은 유용하지만 진리는 아니다. 앞서 '나만의 길을 찾자' 라는 장에서 이 아이디어의 도움을 받았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부분적으로는 칸트의 작업을 정교화하고 수정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에서 파생된 결과물이다. 칸트는 우리의 개별적인 정신이 현실 경험을 조직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보편적인 형태가 모든 현실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혐오가 그 개념을 강화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영구적이고 결정적인 자연종의 개념을 제공했고 헤겔의 변증법은 역사 분석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관점주의가 상대주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나 후기 구조주의에 익숙하다면, 관점주의가 그 사상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현존재Dasein라고 하는 하이데거의 인간에 대한 특성화는 근본적으로 이런 관점의 일종이다.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는 해석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시 중에서 몇 편은 관점주의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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