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에 중요성은 학창 시절부터 무지하게 들어왔다. 지금도 성공한 사람들이 책 읽기를 강조하는 영상들은 유튜브에 도배되어 가고 있다. 나도 학생들에게도 책을 읽으라고 노래를 부른다. 말하면 할수록 학생들은 귀를 닫는다. '또 저 소리...'
'학습'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보면 배워서 익힌다는 뜻이다. 배우기만 해서는 않되고 습을 통해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읽기만 해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글쓰기를 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정리가 되고 행동으로 녹여내게 된다.
요즘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생각이 정리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개념 정리이다. 개념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아이는 응용문제가 나와도 풀어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삶도 마찬가지라 본다. 생각 정리가 탄탄히 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풀어나갈 힘을 가지게 되고 자기만의 인생을 설계할 수가 있다. 자청이 역행자에서 말한 성공하기 위해 할 일은 책읽기와 글쓰기, 단 2가지만 하면 된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글쓰기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세 명의 세미 작가가 글쓰기를 왜 하는지에 대해 에세이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글 쓰는 이유는 단지 책을 출판하는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자가 되고 싶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듯 작가가 되면 좋겠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내 삶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살아내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읽어보시라.
글쓰기는 요가와 닮았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일은 요가를 시작하는 일과 닮았습니다. 요가를 시작할 때 '내 몸에 이런 근육이 있었다고?"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글쓰기가 꼭 그래요. 내 안에 이렇게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싶었다고?' 요가의 다양한 자세를 통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근육을 인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도전하며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모르던 열망과 자기 안에 숨어있던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요가는 기본적으로 내면에 집중하는 운동이에요. 사실 운동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죠. 요가는 수련이니까요. 내면을 갈고닦는 일입니다. 요가를 하다 보면 잡생각을 할 수가 없는데, 잡생각을 했다가는 균형을 잃거나, 근육을 제대로 쓸 수 없어요. 집중, 또 집중! 오로지 내 몸과 정신에 집중 또 집중해야만 어설프게라도 요가 자세를 취할 수 있지요.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내면에 집중해야 해요. 나의 행복, 나의 슬픔, 나의 기쁨, 나의…………. 오로지 '나' 집중했을 때,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글로 표현됩니다.
요가가 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요가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일 확률이 높습니다. 어떤 유산소 운동만큼이나 요가는 동적인 운동입니다. 달리거나 뛰어오르지 않더라도 몸의 크고 작은 근육들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니까요.
글쓰기도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정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정적인 활동이 아니에요. 글을 쓰기까지, 글을 쓰는 동안 머리의 회전 속도는 엄청납니다.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거르고 걸러, 품은 생각을 고르고 골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은 결코 정적일 수 없습니다.
요가 초반에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동작들을 해내려면 결국 '꾸준함'만이 답입니다. 같은 자세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다 보면 하루에 1mm씩이라도 근육은 이완될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1mm도 안 되는 날이 많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꾸준히 같은 동작을 계속하는 것.
글쓰기도 마찬가지죠. 조금이라도 나은 글을 쓰려면 꾸준히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설퍼도 쓰고, 완성을 못 해도 쓰고, 문법에 어긋나도 쓰고, 쓰고 또 쓰고, 막 쓰고 계속 쓰고. 그러다 보면 팔이 쭉 펴지고 다리가 쭉 찢어지듯, 글도 조금씩 좋아질 테니까요.
요가 자세는 며칠만하지 않아도 바로 티가 납니다. 요가 전문 강사가 아닌 다음에야(어쩌면 전문 강사라 하더라도), 얼마간 동작을 하지 않았다면 잘 되던 동작이 안 되고 전보다 더 심한 통증을 느낍니다. 근육을 다잡는 일은 어렵지만 흐트러지는 건 한순간이에요.
글쓰기가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근육이 하는 일이에요. 그게 바로 '쓰기 근육'이죠. 자꾸 글을 쓰는 삶으로 움직이고 실천하는 것만이 쓰기 근육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요가 동작처럼 얼마간 게으름을 부리고 나면 금세 약해지고 말아요.
이름 쓰고 보니, 제가 대단한 요가 수련자라도 되는 것 같네요 일상에서 스트레칭으로 요가 동작 몇 가지를 겨우 따라 하는 게 전부인데 말이죠. 그래도 한 번은 꼭 쓰고 싶었습니다. 요가를 할 때와 글을 쓸 때, 꼭 같게 느껴지던 마음을요. 요가나 글쓰기나, 결국 근육이 움직이는 것은 똑같거든요.
우리 모두 요가 수련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요가 동작 몇 가지로 스트레칭 정도는 해볼만하지 않을까요. 스트레칭만 잘해도 생활에 찌든 근육을 풀고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면요. 꼭 그 맥락으로 우리 모두 작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내 마음을 끼적이는 글쓰기 정도는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짧은 글쓰기만으로 삶에 찌든 마음을 털어내고, 조금 더 나를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 진아
관종임을 인정하기까지
우리 모두가 흠모하는 이름, 독자, 독자씨! 감정이고 경험이고 지식이고, 밑바닥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제 글을 누가 읽는다 생각하면 부끄럽고 숨고 싶어 집니다. 때로는 귀찮기도 해요. 혼자 쓰면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만큼 썼다가 또 지울 수도 있지만 누가 본다 생각하면 한번 쓰고 두 번 쓰고 자꾸만 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니까요.
근데 그거 아세요?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독자 씨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걸. 혼자 보고 싶은 일기?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일기장에만 숨죽여 있을 것 같았던 오글거리는 갬성은 싸이월드 일기장을 지나 인스타그램으로 불씨를 옮겨왔고, 블로거에서 만족했던 사람이 이제는 브런치의 작가님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세상입니다. 도망치기는커녕 더 그럴싸한 곳으로 옮겨 왔을 뿐 본질은 같아요. 그건 우리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도, 주제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물론, 독자 씨를 흠모하기는 하지만 우리 잘못은 아니에요.
글의 본질은 읽히는 것입니다. 언어는 말과 글은 표현하기 위함이고 많든 적든 글을 읽는 독자를 전제로 합니다. 독자가 두렵기도 하지만 다음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읽어줄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마디라도 더 생각하게 되고, 한 글자라도 더 바른말을 고르게 되고요. 서로가 서로의 독자가 되어 반응을 주고받으면 덩실덩실 어깨춤도 나고, 때로는 더 먼 곳을 바라보게도 합니다.
어쩌면 한 줄에서 한 편으로, 한 편에서 한 권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들과 함께라면.
때론 다른 생각과 만나 겁이 덜컥 나는 순간도 있지만, 이것도 괜찮아요.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맷집도 생기고, 받아들이고 맞춰가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나와 내 글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은 설레는 긴장감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아직도 '나는 나만 보려고 쓴다.' 하시는 분이 있다면 함께 관밍아웃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내놓을 때 글은 더 좋아지고 나는 더 풍요로워질 거예요.
또 있습니다. 글로 써 비워낸 만큼 반드시 채워진다는 것. '헌집 줄게, 새집 다오.' 같은 기적의 두꺼비는 죽었다 깨나도 없지만, 글쓰기는 다릅니다. 경험과 감정, 생각을 글로 와르르 쏟아내고 나면 새로운 것들이 찾아 들어와 빈자리를 채워 줍니다. 묵은 것들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보다 비워내고 또 채울 때, 언제나 신선하게 지금을 사는 나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만큼 담는 것이 지금의 내가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요. 덜지도 보태지도 말고 마음 가는 딱 그만큼만 쓰면 됩니다. 하나의 글을 완벽히 쓰느라 아무것도 쓰지 못할 바에야, 결론 없이 매일 무엇이라도 쓰는 것이 늘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쓴 만큼 새로운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와 뿌리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일단 씁시다. 처음부터 결론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작가란 아직도 이름 지어지지 않은 것 혹은 감히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라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언젠가 나의 어휘와 문장으로 개념과 사고의 집 한 채 지어낼 수 있는 진짜 작가(作家)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정아
글의 바다에서 만난 것들
《노인과 바다》를 처음 읽은 것도 바로 고3 때였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눈으로 책을 읽긴 했지만, 의미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 책이 그렇게 유명한지,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탄 건지 알 수 없었지요. 수능 지문에 이 책의 문장이 나오길 바라던 열아홉 살의 세계는 좁은 도랑이 었겠지요. 노인의 넓은 바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흔세 살이 되어《노인과 바다》를 다시 펼쳤습니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글을 쓰는 제 세상이 이제는 강물 정도는 된 것 같거든요. 세상이 좀 더 넓어진 만큼 노인의 헛되어 보이는 고집과 끈기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이번엔 수능이 아니라 내 글을 위해 문장을 건져 올리고 싶었습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는 평생을 어부로 살았어요. 하지만 84일째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요. 과거엔 큰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사람보다 더 큰 바다거북을 잡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은 같은 마을에 사는 소년이 가져다준 음식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혹독한 삶 때문에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 걸 그랬나 보다.'라고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습니다. 열아홉의 저는 그런 노인의 마음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어요. 그것은 바로 제가 글을 쓰는 동안 느꼈던 마음이었습니다.
노인은 '어부가 되는 게 내 타고난 운명이 아닌가. 날이 밝은 대로 잊지 말고 꼭 다랑어를 먹어야지'라고 독백합니다. 후회스럽긴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노인이 현명하게 느껴졌어요. 다시 만선 할 날을 기대하며 바다로 나간 노인의 카이로스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기회의 신을 뜻하기도 함)가 애잔합니다.
저 역시 나만의 카이로스를 기다립니다. 제가 쓴 글을 더 많은 사람이 읽어줄 날을 고대하면서요. 그날을 위해 노인의 고백을 나의 언어로 읊조립니다.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게 내 타고난 운명이 아닌가. 날이 밝은 대로 잊지 말고 꼭 글감을 모아야지."
노인은 남겨놓은 다랑어를 먹고 다시 힘을 냅니다. 그리고 더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넓은 바다로 노를 저어갑니다. 저는 글을 쓰기 위해 글감을 수집합니다.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고, 새로운 카페에 가서 새로운 음료를 마셔봅니다. 얼굴만 아는 바리스타에게 말을 건네봅니다. 낯선 길을 걸어보고, 생소한 가게를 기웃거립니다.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내는 것조차 저에게는 글감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미 경험한 것을 썼다면, 이제는 글을 쓰기 위해 경험을 합니다. 글이 삶을 이끌어 갑니다.
글감은 제 삶 속에서 건져 올리는 물고기입니다. 더 많은 물고기를 건져 올리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하러 더 넓은 세상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희로애락이 진하게 담긴 글감에 기뻐하며 여전히 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제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헤밍웨이처럼 400번 넘게 퇴고하면 노인과 바다 같은 위대한 책을 만들 수 있을까요? 퇴고하려면 초고가 필요하니, 일단 쓰겠습니다.
- 선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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