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프랑스의 교육제도와 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한 문장도 버릴 것이 없는 마치 살이 꽉 찬 박달대게 한 마리 배부르게 먹은 느낌의 책이다,
책 제목도 수식어 하나없는 그냥 똘레랑스 독서토론이다. 똘레랑스 단어에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는 그들만의 철학과 가치가 가득 담겨있기에 '다른 건 모르겠고 이것 하나면 된다'라는 강력한 확신이 느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성장기에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 교육이 바뀌어야만 한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활동할 미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바뀌어야만 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 교육은 거꾸로 가는 듯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한 줄로 세우려고 하니 말이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사유하는 과정이 최고의 교육이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성인들도 토론을 통해 소통하고 사유하며 성장한다. 요즘 독서모임이 많아지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 특히 자녀를 둔 학부모라면 강력 추천한다. 읽어보시라.
다름의 가치를 인색해야 할 때이다
한국은 동질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다. 유럽은 다민족 국가인데다 이동이 잦아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문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됐다. 그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평화는 없었다.
한국은 하나로 똘똘 뭉쳐서 생존해왔다. 그래서 단결력, 결속력만큼은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획일화라는 폐단을 낳았다. 다른 아이들을 좇아 같은 학원에 가고, 같은 책을 읽게 되었다. 심지어 독후감마저 비슷하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다름을 인정한다고 해서 프랑스가 독서를 안 하는 아이를 방치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의 논술형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문제당 3페이지 정도의 답을 써야 한다. 독서로 일정 수준의 지식을 축적하지 않으면 답을 쓰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입 시험에 철학 서술형 문제를 낼 정도로 생각하는 힘을 중요하게 여긴다.
프랑스에서는 책을 읽지 않고, 생각을 숙성하지 않고서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수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선정한 지정 도서를 읽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고 나름대로 생각의 폭을 넓힌다. 그들은 '나'를 중심으로 책 읽기를 한다. 내가 선택한 책을 나를 위해 읽는 습관을 들인다. 그렇게 시작하면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된다. 그들은 소설을 즐기고 고전을 탐독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토론한다.
교육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는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기업은 잘 외우는 사람보다는 창의적인 인재를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어릴 때는 창의적이다. 그러나 크면서 일부는 창의성을 잃어버리고 일부는 창의성을 유지하는데, 독서가 큰 몫을 한다. 독서는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겠다는 자기 주도적 활동이다. 거기에 독서의 진정한 가치가 담겨 있다.
한국에서 똘레랑스는 좋은 성적을 얻는 데 불편한 정서로 작용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평가할 때 특정 문학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이런 시험에서는 답이 같을 수도 없고 달라야 한다.
프랑스 아이들은 아이마다 읽는 책의 종류가 다르다. 부모의 직업, 사는 환경, 서점에 비치된 책 종류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어른들도 개인 취향에 따라 누구는 미술 관련 책, 누구는 역사책을 읽는다. 그래서 몇 명이 모여도 읽은 책이 겹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한국은 어느 서점에나 붙어 있는 '인기 도서 목록'을 보고, “요즘 뭘 읽는대"라는 소문에 따라 책을 고르지 않는가. 남이 읽었다는 책을 읽지 않았을 때 괜히 뒤처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획일적이고 다양성이 부족한 사회는 병들기 쉽다. 이제는 '다름', '다양성’의 가치를 인식해야 할 때이다. 독서에도 똘레랑스의 가치를 적용해야 한다. 필독 도서를 천편일률적 방식으로 읽고, 같은 느낌과 결론에 이르게 하는 독서교육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독(毒)이다.
그냥 좀 두자
독서는 분명 최고의 교육이다. 그렇다고 학교에, 학원에 종일 지친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어야 한다. 그 모습을 본 아이는 언젠가는 책을 읽는다.
그냥 좀 두자. 아이의 독서 습관을 만들고 싶으면 환경을 만들고 기다려야 한다. 독서 환경 조성이 부모가 할 일의 전부다.
토론은 소통이다
초등학생들에게는 독서토론보다는 '주제 토론'을 권한다. 편안한 주제를 통해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그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한다. 토론은 외워서 준비하는 공부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면 된다. 표현을 통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동기 토론 주제는 가정 내에서 일상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또 학교에 다녀왔을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먼저 내 주위를 살피는 대화가 바로 토론의 시작이다. 절대 잔소리로 번져서는 안 된다. 아이가 설사 '숙제를 안 하고 사는 바보'가 되겠다고 선언을 해도 그렇게 해보라고 허용해야 한다.
핵심은 똘레랑스다.
IB가 교육방식으로 중시하는 토론 수업은 어릴 때 즐길수록 그 효과가 증폭된다. 창의성 교육에 좋다. 기존 창의성 교육은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영재들에게 국한되었고 선행학습, 일류대 진학에 활용됐다.
IB에서 말하는 창의성은 문화적 뿌리부터 차원이 다르다. IB 토론 수업은 '똘레랑스'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명서에 똘레랑스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더 나은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는 데 기여할 배려심이 많은 청소년'이란 표현은 똘레랑스 가치를 실천하는 청소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토론은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토론으로 생각하는 법,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토론은 무엇인가 가르치지 않지만, 깨닫게 해 준다. 토론을 통해 참여자들이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다른 생각이 만나 서로 부딪히며 다듬어진다. 강압, 강요로는 기대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가슴을 열면 큰 변화를 만날 수 있다. 토론의 마력이다.
토론은 아이를 당당하게 만든다
토론 수업은 일상 속 매사를 궁금하게 만든다. 무엇이든 관찰하고, 의문부호를 붙인다. 사물을 예사롭게 봐 넘기지 않는다. 나무의 초록빛은 어떻게 다른지, 계절에 따라 기분은 어떻게 다른지, 우리 동네 주정차 금지 구역은 왜 생겼는지, 화장실 물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냥 지나치는 게 없을 정도로 들여다본다.
그것들은 소통의 재료들이다. 의욕이 있어도 소통할 재료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 이야깃거리가 많으면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다. 소통 경험이 쌓이면, 앞에 나가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낯선 아이들의 시선과 반응을 많이 경험한 아이들은 수줍은 기질을 극복해 낸다. 또래 사이에서 긍정적 시선을 받고,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많은 사람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어학연수를 가면 외국어 실력이 는다고 한다. 나의 필요에 따라 어떻게 해서든 상대와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어느 날 외국어가 부쩍 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공부도 같은 원리이다. 토론 수업을 하면, 궁금증이 많은 아이끼리 모여 해답의 실마리를 스스로 풀어나간다. 답을 찾으려고 자료를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이런 경험은 더 많은 청중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를 부추긴다. 그 아이는 나중에 누구 앞에서도 자신감 있게 의견을 밝힐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이 남 앞에 서기를 어색해했으나, 단련 과정을 거쳐 능숙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토론은 어색함을 떨쳐버리려는 사람들에게는, 소통의 기술을 익히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단련장이다.
토론은 미래 생존이다
정답을 찾는 교육만 받다가 정답 없는 토론수업을 하니, 아이들이 토론할 때도 습관적으로 모범답안을 찾는다. 그래서는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다. 토론에선 '자기 생각'을, '자기 의견'을 이야기해야 한다. 앞으로는 '자기 생각'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다. 어떤 개인과 집단에 이끌려 사는 시대가 아니다. 구성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조화를 이루는, 투명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 사회 구성원이 되려면 어릴 때부터 '자기 생각'을 떳떳이 밝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아는 토론문화를 익혀야 한다. 토론을 할 줄 알면,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토론으로 미래 생존 비법을 익힐 수 있다.
진정한 자식 사랑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평일에는 영어와 수학, 주말에는 국어나 과학 수업을 들어야 했다. 가족끼리 대화는 주로 학원 스케줄 체크와 숙제 확인이었다. 대호는 점점 밝은 성격을 잃어갔다. 사춘기라서 어두워지는 게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 교육시스템이 아이를 변하게 했다.
아이들이 차라리 반항이라도 하면 그나마 낫다. '조용한' 아이들이 문제다. 부모와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고, 학원 강사의 잔소리도 싫어서, 종일 책을 들고 지낸다. 그렇다고 공부하는 건 아니다. 그게 그 아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좋아하는 걸 못 하다 보니 흥미를 잃게 되고,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잊어버린다. 점점 생각하는 힘도 잃는다. 어른들은 그 아이의 학습 머리가 나쁜 건가?라고 여긴다.
아이는 내 아이가 자라는 방식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키워야 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공부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면 아이는 오랜 탐색 끝에 자신이 공부할 이유와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살아갈 길을 찾는다. 자신만의 방식, 자신만의 고유성 안에서 아이는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아이의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까닭이다. 진정한 자식 사랑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름은 힘이 세다
행복을 비교우위에서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행복은 비교해서 얻을 수 없다. 비교는 불행의 시발점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나다움'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자신이 처한 부족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에 뿌리를 두고 더 나은 삶을 꾀한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성장동력으로 삼는다. '다름'은 힘이 세다.
아이 인생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행복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뒷바라지하고 있는지 뜯어봐야 할 때다. 부모와 자식 간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독립성을 인정해야 한다.
과잉 기대하지 말아야 하고,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아이의 인생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을 부를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격려하고 응원하는 관계가 이상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수준의 관계 형성이 좀 서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아이는 내가 사랑하는 '타인'일 때 가장 잘 자란다
자녀를 '타인'으로 인식하고 키워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한국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낳았고, 키웠고, 사랑하는데, 훈육하려고 말 좀 막 하면 어때서………’, 터무니없이 당당하다. 감정 표현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게 무슨 가족이냐고 생각하고 당연시하는 잘못된 문화적 풍토 탓이다.
들을 준비가 안 된 아이에게 해대는 막말은 생각보다 큰 상처가 된다. 자존감이 약할 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은 치명적이다. 부모라고 늘 격려의 말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사랑한다면 아이가 몇 살인지, 어떤 상황인지, 동등한 관계인지 고려하고 배려해서 말해야 한다.
가족이나 이웃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행복을 찾으려면, 자기 인생을 남편이나 아이에게 이입시키지 말고, 자신이 가진 고유성을 지키며 당당히 살아가면 된다. 아이가 독립적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어른이라고 자기 생각을 아이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그게 자녀 교육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지 않는다
1970, 1980년 대생들은 2000년, 2010년대생 자녀들을 자기가 했던 대로 공부시킨다. 그들은 자신이 줄을 섰듯 아이들을 줄 세우려 한다. 줄을 서 있다가 성적이 떨어지면 줄을 바꾼다. 학원을, 학군을, 지역을 바꾼다. 영어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지 않고 영어를 가르친다. 수학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지 않고 수학학원을 보낸다. 부모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아이들이 어차피 싫어한다고 하니까 그냥 보낸다고 답한다. 인격을 무시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은 자존감이 생기고, 도덕성을 갖추면, 간섭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학습은 한다. 그리고 적성에 따라 스스로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다. 줄을 세우면 1등부터 꼴등까지 모두 힘들다. 행복한 아이가 사라진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
아이는 부모의 억압이 싫어도 주변 친구 모두 그렇게 사니 당연하게 여겨 특별히 반발하지도 않는다. 억압받지 않는 환경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억압적인 환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유 없이 화만 낸다.
아이가 진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부모의 간섭과 무조건적 줄 세우기에 휘둘리고 있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어떤 인성을 지닐까. 입시는 왜 아직도 이렇게 일그러진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망가진 소통과 관계 위에 세워진 학력은 다음 세대로 또 이어질까. 16세 아이 모습 그대로, 18세 아이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 무렵 아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울 때인가. 사랑과 존중을 배우고 체험해야 할 때 아닌가.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잊고 있지는 않을 텐데,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토론은 '치유'였다
모국어를 예로 들면 처음 몇 단어는 플래시 카드로 배운다. 그러나 플래시 카드로 아이가 하는 말 전체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공부도 그러하다. 외우고 시험 보는 것으로는 아주 일부를 배울 뿐 전체는 잠재력이 이끌어낸다. 공부 역량은 잠재력이며, 잠재력을 일깨우는 가장 좋은 학습법은 토론이다. 미래를 살아갈 아이가 갖추어야 할 역량은 협력,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 자신감, 창의적 혁신 등이다. 이러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학습법은 토론이다.
왜 이러한 역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이다. 토론 수업을 하며 아이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하게 되었다. 그게 토론 수업의 가장 큰 성과였다.
우리는 살면서 무의식 중에 타인의 삶을 많이 좇는다. 남이 산 차를 사고 싶어 하고 남이 듣는 음악을 좋아한다. 심지어 남이 좋다는 방식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팽팽하게 얽혀 있다. 때로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나답게' 살아야 행복하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배려'를 기반으로 '나답게 사는 걸 말한다.
토론 수업은 내가 내 생각을 말하는 시간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나'를 경험하면 삶의 심지를 튼튼하게 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토론하며 '소통'하는 법을 터득해 바르게 관계 맺고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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