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심슨이 시울라 그란데에서의 조난 사고를 게임으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연구와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네이비실 버즈 테스트에 참가한 제임스 워터스를 기억하는가? 그에게 버즈 테스트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본인이 힘든 상황에서도 잘 버티고 이겨내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버즈 테스트에서는 그런 판단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훈련생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건 게임이다. 재미를 잃지 않되 눈은 계속해서 더 큰 그림을 향해야 한다.
수업과 성적 체계가 게임과 비슷해지면 학생들의 성적이 올라간다. 뉴욕주에 있는 랜셀러 공과대학교의 한 교수는 자신의 수업 방식을 유명한 온라인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비슷하게 바꾸었다. 그랬더니 학생들의 학구열과 참여율이 올라갔고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도 현격히 줄었다.
이제 질문 몇 개를 던져보겠다. 게임이나 일이나, 계속하다 보면 힘에 부치고 절망스럽고 짜증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게임은 그렇게나 재미있는 반면 일은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나오는 것인가? 숙제도 게임도 늘 똑같은 것의 반복이고 이걸 언제 다 하나 싶을 정도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왜 아이들은 숙제를 내팽개치고 기쁜 마음으로 게임을 하러 달려가는 것인가? 왜 퍼즐 맞추기는 재미있어 하면서 세금 신고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치는가? 하기 싫어 미치겠고 쳐다보기도 싫은 어떤 것을 재미있는 게임으로 바꾸는 요소는 무엇인가?
살다보면 우리는 마음은 간절한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겪는다. 그럴때마다 스스로에게 실망스럽고 화가 난다. 하지만 가끔은 호기심이 발동해 제 발로 이상한 나라의 토끼 굴로 들어가서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재밌어!"를 외쳐댄다. 수수께끼의 사건을 만난 탐정처럼 말이다.
개인의 스토리는 삶의 혼란을 여과해준다는 타일러 코웬의 설명처럼, 게임이라는 것은 쭉 연결된 행동들을 포장하는 틀에 불과하다.
단 몇 가지 요소만 추가해도 지루한 세금 신고가 둘도 없이 재미있는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 하나는 '인지 재평가'다.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은 '같은 상황을 다른 스토리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밥을 먹지 않겠다고 바락바락 떼를 쓰던 아이가 비행기 모양의 스푼으로 바꾼 후 순순히 입을 벌리는 것과 비슷하다. 어른들도 젖먹이 아기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월터 미셸의 마시멜로 연구는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는 이 연구 결과를 의지력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아이들은 눈 앞의 마시멜로 하나를 먹지 않고 참으면 나중에 두 개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의지력이 더 높은 아이들이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버텼고, 나중에도 훨씬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와 같은 흐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 참고 버틴 아이들의 대부분이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도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 이 아이들은 유혹을 참느라 진땀을 흘리지도 않았고,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인지 재평가를 했다.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다. 다시 말해 그 순간을 게임으로 여겼다. 미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맛있는 군것질거리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 아이들은 간식도 벨도 건드리지 않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결국 나와 대학원생들이 못 이기고 먼저 방에 들어갔다."
지금의 현실을 다른 스토리로 말하기 시작할 때, 패러다임이 180도 뒤바뀐다. 일부 연구에서는 의지력도 근육처럼 무리하게 쓰면 지친다고 말한다. 힘든 싸움만 계속된다면 의지력이 고갈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게임의 틀을 쓴 순간 힘겨운 싸움이 다른 것으로 변한다.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진다. 스토리가 바뀌니 행동도 바뀐다. 마시멜로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이 그랬듯, 의지력이 사라지지 않게 이를 꽉 깨물지 않아도 아주 수월하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
공상과학 소설은 재미있다. 그러나 삶은 어떠한가? 왜 우리는 일에서 재미를 얻지 못하는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현실 속의 일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재미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지루해지는 것에 면역력이 생긴다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온갖 따분한 일들을 아주 정확하고 빠르게 대신 처리해주는 컴퓨터와 비슷해질 수 있다. 컴퓨터에는 게임의 틀이 필요 없다. 컴퓨터는 지루함에 몸서리치지도 않고 의욕상실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사무실을 한번 들여다보자. 사무실의 설계 방식을 보면 인간을 기계로 가정한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게임 연구자이며 게임 디자이너이기도 한 제인 맥고니걸의 주장에 따르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모든 계획은 본질적으로 노동 설계에서 게임의 틀을 없애는 방향을 흘러간다. 쉽게 말해 효율성은 일에서 재미를 제거한다.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 가정은 틀린 부분도 많지만, 몇 가지는 그의 주장이 옳다. 인간과 노동의 감정적 연결 고리를 없애고 인간을 오로지 노동 기계로서만 대할 때 노동자의 영혼은 박살 난다.
이런 감정적 연결 고리를 되살릴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예일 대학교 혁신협력팀은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목표는 학생식장을 이용한 학생들이 식사 후에 손 소독기를 더 많이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방법을 썼을까? 학생들에게 정보의 융단 폭격을 날렸는가? 대학 행정부에 건의를 해서 새 교칙을 정했는가? 아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재미를 살리는 것'이었다.
혁신협력팀은 스피커 몇 개와 아이팟을 손 소독기에 부착했다. 누군가 손 소독기를 사용하면 기계에서는 '피유웅' 하는 소리가 나온다. 맞다. 비디오게임에서 점수를 획득하면 나오는 그 소리다. 이런 장치를 설치하기 전에 손 소독기를 사용한 학생은 13명이었다. 설치 후에는 91명으로 늘었다. 시시껄렁한 '재미'를 살짝 첨가했을 뿐인데도 손 소독기 사용자 수는 순식간에 7배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게임의 틀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하면 하품 나게 따분한 순간도 재미있는 순간으로 바뀔 수 있다. 재미를 더하는 것이 우리의 그릿을 늘리고 성공 가능성도 높이는가? 물론이다. 일이라고 해서 꼭 더럽게 재미없는 게임이 되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일은 왜 그렇게 재미없는지, 게임은 왜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를 흥분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일을 게임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시스템과 게임하기'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게임의 캐릭터를 키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일이 더이상 일이 아니라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이다. 아주 공감되는 부분이다. 나를 하나의 게임 속 캐릭터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무엇을 보완해야 할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좀 더 쉽게 접근할 수가 있을 것이다. 캐릭터의 레벨 업하는 재미도 솔솔 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내가 성장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기 힘들지만 게임에서는 레벨 업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는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나만의 레벌을 정해놓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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