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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코드] 수학 잘하는 뇌섹남이자 음악가

by 거꾸로 아빠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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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정약용 코드다. 다빈치 코드가 생각난다. 왠지 생각나야 할 것만 같다. 정약용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여러모로 닮아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갓 쓰고 헛기침하는 200여 년 전 고리타분한 선비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바라는 미래를 위한 통섭형 인재가 바로 정약용이고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 지식을 모두 갖춘 양손잡이 지식인이라고 한다.

 

국사시간에 배웠던 정약용 코드는 실용주의, 실학자, 수원성, 거중기, 정조의 충신, 목민심서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준익 감독의 흑백 영화 '자산어보'의 저자가 바로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이다. 정약용이 더욱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특히 포항 장기 유배생활 중에 목숨 걸고 부른 시 '솔피 노래'는 정조에 대한 충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다의 늑대로 불리는 범고래는 돌고래, 향고래, 대왕고래 등의 동족을 잡아먹을 정도로 포악하고 상어를 잡아먹는 고래가 바로 범고래다. 포악하고 무시무시한 범고래는 조선에서 '피'라고 불렸다. 사자나 하이에나처럼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에 덩치 큰 대왕고래도 공격해 잡아먹을 수 있는 거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임 당했음을 확신하고 정조를 큰고래, 노론 일당을 범고래에 은유하면서 대왕고래인 정조가 범고래(솔피)인 노론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조정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론이 범고래처럼 무리 지어 다니면서 사방팔방에서 덤벼들어 큰 고래인 정조를 잔혹하게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얘기다. 역사와 철학이 공존하는 책 '정약용 코드' 읽어보시라.

 

 

 

 

정약용_코드_책
정약용 코드

 

수학 잘하는 뇌섹남이자 음악가

정약용에게 붙여진 타이틀은 셀 수 없이 많아 딱히 그의 직함을 규정짓기는 어렵다. 학자, 문신, 사상가, 철학자, 저술가, 시인 법학자, 역사가 등의 타이틀이 붙는다. 때로는 개혁가, 실학가라고들 한다. 여기까지는 조선의 다른 선비에게도 따라붙을 수 있는 직함이다. 정약용은 음악가이자 수학자인 동시에 과학자, 엔지니어, 건축가 등으로 불렸다. 임금이 아플 때 찾는 의사였고, 무기와 국방, 국제정세에도 밝은 군사전문가이었고, 장군의 기질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인문과 과학을 드나드는 통섭형 인물이었고, 문과와 이과를 넘나드는 양손잡이식 능력을 보여줬다. 과학과 예술에서 재능을 발휘한 르네상스형 천재였다. 한두 가지 일에 재능이 뛰어난 게 아니라 모든 일에 다재다능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그렇다고 단순한 팔방미인이 아니다. 모든 일에 전문가적인 식견과 재능을 발휘했고, 전문지식의 깊이는 여느 전문가를 능가했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분야에도 소양을 갖고 있어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낸 인물이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미래형 지식인의 모습이 바로 통섭형 인물 정약용이다.

흔히들 정약용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닮았다고들 한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의 바우더베인 발라번 교수는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역사인류학 자료로서 다산의 저술들」이라는 논문에서 “세계적으로 그토록 높은 수준으로 그렇게 다양한 것들에 몰두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면서 "정약용을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에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다빈치는 15세기, 정약용은 18~19세기 인물이다. 두 사람은 300년 넘는 세월의 간극과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있지만 너무 닮았다. 두 사람은 과학과 예술에서 재능을 발휘한 르네상스형 천재였고, 수학자이자 음악가였고, 과학자였다. 원근법에 대한 이해도 함께했고, 메모광이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다빈치는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 궁전에 들어서면서 자신을 '음악가'라고 소개했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같은 세계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신을 음악가라고 소개한 이유는 밀라노에 초빙된 자격이 미술가가 아닌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밀라노 공국의 공작인 루드비코 스포르차는 다빈치의 음악가이자 파티 기획자의 재능을 높이 샀다. 밀라노에서 다빈치 역할은 스포르차를 위한 무도회 기획이었다.

다빈치는 음악 기획자뿐 아니라 실제로 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해부학자이기도 한 다빈치는 인체를 해부해서 목구멍의 구조를 비교한 결과 음높이를 서서히 높이고 낮추는 기법을 찾아냈다. 하프처럼 생긴 악기 리라를 개발했는가 하면, 여러 악기의 음조와 음색을 조합했다. 

그는 미술가, 과학자였고 동시에 정약용처럼 음악가이자 수학자였다. 다빈치의 수학적 재능은 '원의 구적'과 사면체의 무게중심에서 찾을 수 있다. 다빈치는 원과 똑같은 정사각형을 그리는 원의 구적 문제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와 구, 원뿔, 원기둥, 피라미드 등의 입체 도형들을 그려내는 재능을 발휘했다.

정약용과 다빈치의 닮은 모습은 원근법에서도 확인된다. 정약용은 어린 나이에 지은 시에서 원근법을 묘사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小山大山), 땅의 멀고 가까움이 같지 않아서라네(遠近地不同)”라는 시를 7살 때 썼다. 

어린아이가 원근법의 개념을 시에 표현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원근법은 다빈치가 활동하던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전문 화가들이나 사용하던 그림 법이고,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을 사용한 걸작이다. 천재들끼리는 300년의 세월과 동서를 뛰어넘어 소통하고 교감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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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맨과 노맨의 차이

총애 대신 존경을 받으라는 정약용은 존경과 착각하는 사례들을 나열한다. 잘 나가는 고위공직자들이 대부분 착각하는 사례에 해당된다. 윗사람이 잘 대해 준다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받아들이면 오해다. 아침저녁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측근이라고 해서 임금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면 착각이다. 시나 글을 잘하는 신하, 글씨를 민첩하게 쓰고 학문적 소양이 높은 신하라고 임금이 존경하지 않는다. 윗사람 얼굴빛을 살펴 비위를 잘 맞추거나 윗사람 앞에서 툭하면 벼슬을 그만두겠노라고 말하는 이는 더더욱 존경하지 않는다.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은 거리가 완전히 멀다.

행여 윗사람이 자신에게 은밀하게 일을 부탁한다고 존경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하는 듯한 서신을 주고받고, 궁궐의 금지된 정원에 초대받는다고 존경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임금으로부터 하사품을 받고, 임금과 공부하는 자리인 경연에서 임금이 자신에게 온화하게 말을 건넨다고 존경은 아니다. 수시로 불러 업무를 상의한다고 존경한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요즘으로 치면 권력자와 주말마다 골프를 함께 치고, 매일 저녁 술자리를 함께하고, 수시로 카톡이나 이모티콘을 주고받는 사이라도 존경으로 받아들이면 착각이고 오해다.

과연 어떤 사람이 존경을 받는가 불가능할 것 같은 존경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약용은 임금의 존경 와 신뢰를 받는 비결은 “할 말을 하는 데 있다"라고 강조한다. 신하가 비록 미관말직에 있더라도 신중하고 부지런하게 정성을 다해 임금에게 할 말을 해야 한다. 비서는 직급의 높낮이에 무관하게 똑같은 비서다. 직급 낮은 비서도 임금에게 언제든 건의와 직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낮은 직급을 이유로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거쳐 의견을 개진하는 관료주의에 젖어 있으면 조직은 활력과 생기를 잃게 된다. 위기 시에 대응할 타이밍을 놓치기 쉽다. 정약용은 윗사람의 잘못이 있으면 비록 낮은 자리에 있더라도 바로잡아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금 주변의 못된 신하가 있으면 물러나게 해야 한다. 임금에게 할 말을 하는 신하, 임금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신하를 임금이 존경하고 신임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약용은 임금 앞이라고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입안의 혀처럼 놀면서 임금 눈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정조가 “일처리를 네 마음대로 하려 하느냐"고 불쾌감을 드러낼 정도로 당당하게 할 말을 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두 차례나 어명과 지시 이행을 거부했다. 그게 정약용의 단점이면서 장점이다. 언제나 할 말을 하는 정약용은 정조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정조에게는 태양증이 있다. 태양증은 다혈질이고, 흥분을 잘하고, 조급한 성격이다. 분노를 참거나 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직설하고 마는 성격이다. 비밀편지를 숱하게 주고받은 노론의 영수 심환지와 서용보 등 주변 측근들에게 주로 태양증이 폭발됐다. 하지만 정약용은 한 번도 정조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다. 그 정도면 상당한 존경과 존중을 받은 셈이다.

 

 

목숨 걸고 부른 「솔피 노래」

포항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기간은 1801년 2월 27일부터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질 때까지 8개월가량이다. 정약용은 비교적 짧은 장기 유배생활에서 『이아술』, 『기해방례변』, 『소학 보전』, 『촌병혹치』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정약용이 지은 시 한 편이 있다. 바로 「솔피 노래」다. 

솔피 노래는 한자로는 「해랑행(行)」이다. 해랑海)은 '바다 해(海) 이리 랑(狼)'이다. 뜻 그대로 하면 '바다의 늑대', '바다의 깡패'라고 할 수 있는데, 범고래를 말한다.

고래는 성격이 온순하고, 덩치가 크면서도 플랑크톤과 작은 새우 등을 먹이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바다의 늑대로 불리는 범고래는 '킬러 고래(killer whale)'다. 돌고래, 향고래, 대왕고래 등의 동족을 잡아먹을 정도로 포악하다. 상어도 잡아먹기 때문에 상어보다 더 포악하고 생태계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다. 상어가 고래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상어를 잡아먹는 고래가 바로 범고래다. 때로는 사람을 공격하는 일도 있다. 사자나 하이에나처럼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무리 지어 다니기 때문에 덩치 큰 대왕고래도 공격해 잡아먹을 수 있는 거다.

포악하고 무시무시한 범고래는 조선에서 '피'라고 불렸다. 범고래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오래지 않는다. 범고래가 돌고 내의 한 종으로 처음 분류된 것은 1758년 스웨덴의 린네에 의해서다. 정약용이 솔피 노래를 짓기 불과 42년 전이다. 본격적인 학술연구도 1970~1980년 들어 이뤄졌는데 정약용이 어떻게 범고래 솔피의 존재를 알았을지 궁금하다. 고래잡이가 이뤄지는 포항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짧은 기간에 솔피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수 있다. 솔피의 존재를 전설처럼 전해 들었을 수는 있지만 시에서 묘사하는 솔피의 행태는 무척 구체적이다. 마치 포항 앞바다에서 솔피 모습을 직접 관찰하고 쓴 것 같다.

 


솔피 노래(海狼行)

솔피란 놈 이리 몸통에 수달 가죽
가는 곳마다 열 마리 백 마리 무리지어 다니는데
물속 날쌔기가 나는 듯 빠르기에
갑자기 덮쳐 오면 고기들 알지 못해.

큰 고래 한입에 천석 고기 삼키니
한 번 지나가면 고기 자취 하나 없어
솔피 먹이 없어지자 큰 고래 원망하여
큰 고래 죽이려고 온갖 꾀를 짜내었네.

한 떼는 고래 머리 들이대고
한 때는 고래 뒤를 에워싸고
한 떼는 고래 왼편 노리고
한 때는 고래 오른편 공격하고
한 때는 물에 잠겨 고래 배를 올려치고
한 떼는 뛰어올라 고래 등을 올라탔네.

상하 사방 일제히 고함지르며
살가죽 찢고 깨물고 얼마나 잔혹한가.

고래 우뢰처럼 울부짖으며 물을 내뿜어
바다 물결 들끓고 푸른 하늘 무지개 일더니
무지개 사라지고 파도 차츰 가라앉아
아아! 슬프도다 고래 죽고 말았구나.

혼자서는 무리의 힘 당해낼 수 없어라
약삭빠른 조무래기 드디어 큰 재앙 해치웠네.

너희들 피투성이 싸움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나
본뜻은 기껏해야 먹이싸움 아니더냐.

큰 바다 끝없이 넓기만 하여
지느러미 날리고 꼬리 흔들며
서로 좋게 살 수 있으련만
너희들은 어찌 그리 못하느냐.

 


뜬금없이 포항 장기에서 범고래의 잔혹함을 묘사한 시 「솔피 노래」를 지은 이유는 바로 정조의 죽음 때문이다. 정조가 4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유를 놓고 온갖 설과 주장이 난무했고, 의혹은 지금까지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진행형이다. 독살설에서부터 단순한 의료사고였다는 주장, 스트레스와 흡연, 과음이 원인이라는 등….

정약용은 정조가 죽임 당했음을 확신하고 있다. 정조를 큰 고래, 노론 일당을 범고래에 은유하면서 대왕고래인 정조가 범고래(솔피)인 노론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조정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론이 범고래처럼 무리 지어 다니면서 사방팔방에서 덤벼들어 큰 고래인 정조를 잔혹하게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얘기다.

 

정약용_코드_책든_아이
정약용 코드


현실이 된 예언, 그러나 개혁은 없었다

"털끝만큼 작은 일까지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금 이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야 말 것이다"
『경세유표』에 나오는 나라를 개혁하자는 정약용의 외침이자 호소다. 지금도 개혁을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단골 표현이다. 조선은 암으로 치면 전이가 될 만큼 됐고, 당장 수술을 서둘러야 하는 4기쯤에 해당된다는 진단이다. 긍정적인 시그널은 수술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다는 점이다. 나라를 당장 뜯어고치자는 정약용의 외침은 컸지만, 메아리는 공허했다. 나라의 수술은커녕 『경세유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돼버렸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라는 정약용의 예언 아닌 예언은 불행하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1817년 『경세유표』저술이 미완인 상태로 마무리된 지 정확히 93년이 지난 1910년 조선은 한일합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불길한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채 백 년이 걸리지 않았다. 도중에 정약용의 개혁 정신은 고종에 와서 호출된다. 그의 사후 47년이 지난 1883년 고종은 정약용의 저술을 필사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고종이 주목한 것은 『경세유표』의 부국 강병책이다. 나라를 잘살게 한 다음에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외적에 대비하겠다는 거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상황에서 정약용의 부국 강병책을 떠올린 건 당연했다.

고종은 정조를 보필했던 '정약용 같은 인물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크게 아쉬워했다. 고종은 『여유당집』을 필사하라고 지시하고 정약용이 자신과 같은 시대에 살지 않음을 많이 아쉬워했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은 기록하고 있다. 고종의 1896년 광무개혁에 정약용 같은 이가 함께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고종은 정약용의 증손을 과거시험에 합격시켜 주는 선에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돼 나라가 사라지기 몇 개월 전, 정약용에게 '문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해서 나중에 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시호가 '충무공이듯, 정약용의 시호는 문도공이다. 이순신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으로 불리고 있으나 '문도공 정약용'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다산'으로 불리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방례초본』에서 『경세유표』로 이름을 바꾼 '정치적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다. 정약용 개혁사상과 부국강병책이 고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방례초본이 농민혁명에 영향을 끼친 '보이지 않는 책'이었다는 거다.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한 해 전인 1817년「방례초본』 저술을 미완으로 마무리한 뒤, 한 부를 이청과 초의 선사에게 주면서 비밀리에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청은 중풍을 앓고 있던 스승 정약용을 대신해 저술을 받아썼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이다. 초의선사는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가깝게 교류하던 혜장선사의 제자다. 두 사람에게 맡긴 방례초본』은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과 농민운동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에게 전해졌다. 

 

『방례초본』이 '정다산 비결'로 전해졌고, 동학농민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사람이 평등하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바로『방례초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다.

물 관군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뒤 "다산의 비결이 녹두 일파의 비적을 선동했다"면서 정약용이 살았던 강진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의 사찰을 수색했다는 기록이 「강진 읍지」에 기록됐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강진 읍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자찬묘지명」에는 『경세유표』가 48권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남아 있는 건 43권이다. 나머지 5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유실됐을 수도 있고, 5권이 동학농민혁명에 영향을 준 '보이지 않는 책'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온다. 유배 중에는 『방례초본』이었다가 고향 남양주로 돌아와서는 『경세유표』로 책 이름을 바꾼 이유가 '보이지 않는 책' 정다산 비결 때문이라는 얘기다. 『방례초본이 동학농민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본격적인 확인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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